“7년간 영업 총괄 이사로 일하며 쌓은 거래처 정보를 들고 나가 경쟁사를 차렸습니다. 이건 영업비밀 침해 아닌가요?” – 퇴사 후 경쟁사 창업 사건
직관적으로는 당연히 문제가 될 것 같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영업비밀과 단순 업무 정보의 경계, 이 판결이 명확히 그어줍니다.

■ 사실관계 요약
원고 주식회사 A는 헤드셋, 스피커폰, 무선회의 시스템 등 전자통신 제품의 제조·유통·도소매업을 영위하는 회사입니다.
피고 B는 2014년부터 원고에서 영업 총괄 이사로, 피고 C는 2015년부터 영업 담당 차장으로 각각 근무하다가 2021. 7. 31. 동시에 퇴사하였습니다. 피고들은 재직 중 영업비밀보호 서약서를 작성하였는데, 이 서약서 제8조에는 “회사에서 지득한 영업비밀을 가지고 2년 이내에는 창업을 하지 않겠다”는 경업금지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피고들은 퇴사 직전인 2021. 7. 5. 원고와 동종 업종인 소외 주식회사 D를 설립하였고, 피고 B는 대표이사, 피고 C는 사내이사로 취임하였습니다. 이후 소외 회사는 원고가 기존에 한국총판을 맡고 있던 E사의 F 제품(콜센터용 헤드셋 등)에 대한 한국총판계약을 새로 체결하여 영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원고는 피고들이 거래처 정보, 단가 정보, 매출 정보 등 이 사건 정보를 무단으로 삭제·복제·반출하여 소외 회사 영업에 사용하였다며 501,000,000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습니다.
■ 쟁점 정리
본 사건의 핵심 쟁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이 사건 정보(거래처 정보, 단가 정보, 매출 정보 등)가 부정경쟁방지법상 ‘영업비밀’ 또는 ‘영업상 주요자산’에 해당하는가?
영업비밀로 인정되려면 ① 비공지성, ② 독립된 경제적 가치, ③ 비밀관리성이 모두 충족되어야 합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이 사건 정보가 이 세 가지 요건을 갖추었는지가 핵심이었습니다.
둘째, 피고들이 이 사건 정보를 실제로 무단 삭제·복제·반출하였는가?
원고는 서버 접속기록과 증인 증언을 근거로 피고들의 무단 반출을 주장하였으나, 이것이 증거로서 충분한지가 문제되었습니다.
셋째, 이 사건 서약서 제8조의 경업금지 조항을 피고들이 위반하였는가?
피고들이 퇴사 후 2년 이내에 동종 업종 회사를 설립한 것은 사실이나, 경업금지 조항의 적용 요건인 ‘영업비밀을 가지고’ 창업하였는지가 쟁점이었습니다.

■ 판시 내용
가. 이 사건 정보의 영업비밀 해당 여부 — 불인정
법원은 이 사건 정보가 원고의 영업비밀 또는 영업상 주요자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거래처 정보의 비공지성 부정
거래처의 상호·연락처·담당자 등은 이미 동종 업계 전반에서 공유되고 있는 정보이거나 원고를 통하지 않고도 어렵지 않게 확보할 수 있는 정보에 해당합니다. 더욱이 소외 회사는 E사와 한국총판계약을 체결한 상태였으므로, F 제품의 국내 고객 관련 정보는 E사로부터 직접 제공받을 수 있는 정보였습니다.
영업비밀에서 ‘공연히 알려져 있지 아니하다’는 것은 그 정보가 불특정 다수인에게 알려져 있지 않아 보유자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통상 입수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이 사건 거래처 정보는 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였습니다.
② 단가·가격 정보의 비공지성 부정
원고의 거래처들은 원고와만 독점적 거래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여러 업체와 단가를 비교하며 거래하였고, 경쟁업체 간에 납품가격이 상당 부분 알려져 있거나 예측 가능하였습니다. 또한 소외 회사는 E사로부터 F 제품의 단가 정보를 직접 제공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③ 매출 정보 등의 경제적 가치 부정
원고의 영업계획, 매출 목표, 직원별 매출 성과 등은 단순히 원고 내부의 성과 달성 상황과 포부가 기재된 것에 불과하여, 다른 경쟁업체에게 어떠한 경제적 가치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④ 비밀관리성 부정
이 사건 정보는 원고의 클라우드 시스템 및 H 프로그램에 저장되어 있었는데, 원고의 직원이라면 누구나 접근이 가능하였습니다. 이는 객관적으로 비밀로 유지·관리되고 있던 정보라고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⑤ 계약 종료로 인한 보호가치 소멸
이 사건 정보 중 상당수는 F 영업 관련 정보인데, 원고는 피고들 퇴사 무렵 E사와의 한국총판계약을 해지하고 G사와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따라서 E사로부터 제공받은 F 영업 관련 정보는 계약 종료와 동시에 폐기해야 하는 정보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원고에게 더 이상 보호가치 있는 영업비밀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⑥ 원고의 행동에서 드러난 인식
원고는 소외 회사가 E사와 한국총판계약을 체결하여 F 제품을 판매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외 회사에 F 재고를 판매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원고 스스로도 해당 정보가 더 이상 보호가치 있는 영업비밀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나. 무단 반출 행위의 증명 부족
법원은 피고들의 서버 접속기록만으로는 어떤 내용을 구체적으로 수정·삭제하였는지, 그 행위가 통상적인 업무 범위를 벗어난 것인지, 외부 반출이 있었는지를 알기 어렵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또한 증인 I의 증언은 해당 증인이 소외 회사 계정에 무단 접속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점에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다. 경업금지 조항 위반 여부 — 불인정
이 사건 서약서 제8조의 경업금지 조항은 “원고의 영업비밀을 가지고 2년 이내에 창업하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단순히 동종 업종 창업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영업비밀의 이용을 전제로 한 조항입니다.
법원은 이 사건 정보가 원고의 영업비밀에 해당하지 않고, 피고들이 이를 무단 반출하였다는 증거도 없는 이상, 경업금지 조항 위반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서울남부지방법원 2023. 11. 8. 선고 2022가합107761 판결).
결론적으로 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전부 기각하였습니다.

■ 핵심 포인트 — 반드시 알아야 할 3가지
① 거래처 정보는 원칙적으로 영업비밀이 되기 어렵습니다.
거래처의 상호·연락처·담당자 정보는 동종 업계에서 공유되거나 공개적으로 확인 가능한 경우가 많아 비공지성 요건을 충족하기 어렵습니다. 영업비밀로 보호받으려면 단순한 거래처 목록을 넘어 해당 거래처의 구매 패턴, 특수한 니즈, 내부 의사결정 구조 등 공개되지 않은 심층 정보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춘천지방법원 2016. 2. 3. 선고 2014가단34228 판결).
② 비밀관리 조치가 없으면 영업비밀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직원 누구나 접근 가능한 클라우드 시스템에 저장된 정보는 비밀관리성 요건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영업비밀로 보호받으려면 접근 권한 제한, 비밀 표시, 비밀유지서약서 징구 등 객관적으로 비밀로 유지·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이 인식 가능한 상태여야 합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③ 경업금지 조항은 ‘영업비밀 이용’을 전제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경업금지 조항을 작성할 때 “영업비밀을 가지고”라는 문구를 포함시키면, 영업비밀 해당성이 인정되지 않는 경우 경업금지 조항 위반도 인정되지 않는 결과가 발생합니다. 경업금지 자체를 강력하게 보호하려면 영업비밀 이용 여부와 무관하게 일정 기간 동종 업종 창업·취업을 금지하는 조항을 별도로 명시하되, 그 범위와 기간이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민법 제103조).
■ 마치며 — 영업비밀 보호, 퇴사 전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이 판결은 기업들에게 중요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영업비밀 보호는 분쟁이 발생한 후가 아니라, 정보를 생성하고 관리하는 단계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거래처 정보, 단가 정보, 매출 정보를 영업비밀로 보호받으려면 ① 접근 권한을 직급·업무별로 세분화하고, ② 비밀 표시를 명확히 하며, ③ 정기적으로 비밀유지서약서를 갱신하고, ④ 퇴사 시 자료 반환·폐기 절차를 철저히 이행해야 합니다.
“우리 직원이 7년간 쌓은 정보를 들고 나갔다”는 억울함만으로는 법원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영업비밀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관리될 때 비로소 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서울남부지방법원 2023. 11. 8. 선고 2022가합107761 판결,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