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편집부가 직접 번역하고 교정하고 윤문까지 했는데, 왜 저작권이 우리 것이 아닌가요?” 출판사의 이 주장은 얼핏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법원은 출판사가 자기 이름으로 등록한 번역물 저작권을 모두 말소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출판사 번역물 저작권 분쟁.
40년 넘게 출판해 온 전집의 번역 저작권이 하루아침에 원저작물 출판사에게 귀속된 것입니다. 업무상저작물 요건은 왜 이렇게 엄격하게 적용될까요? 그리고 ‘회복저작물’ 부칙 조항은 왜 출판사를 구하지 못했을까요? 이 판결은 번역물 저작권 귀속과 저작권등록 말소에 관한 핵심 법리를 담고 있습니다.

1. 사실관계 요약
원고 A는 1974년경 미국의 G사를 통하여 미국에서 ‘H’라는 제목의 도서 전집(총 60권, 이하 ‘이 사건 원저작물’)을 출판한 회사입니다. 원고는 1938년 ‘D’라는 상호로 설립되어 수차례 상호를 변경한 끝에 현재의 상호에 이르렀습니다.
원고는 1980. 2.경 피고 주식회사 B와 국내에서 이 사건 원저작물의 국문 번역본인 ‘I’ 전집(이하 ‘이 사건 전집’)을 출판할 권리를 피고에게 부여하는 내용의 출판계약(이하 ‘이 사건 출판계약’)을 체결하였고, 피고는 1982. 5. 20.경부터 국내에서 이 사건 전집을 출판하였습니다.
그런데 피고는 이 사건 전집의 동화 부분(이하 ‘이 사건 번역물’)에 대하여 종류를 ‘2차적저작물 > 어문 > 번역물’로 하여 자신을 저작자로 하는 저작권등록(이하 ‘이 사건 저작권등록’)을 마쳤습니다.
이후 피고가 원고의 승인 없이 2019. 2.경부터 2020. 12.경까지 이 사건 전집을 판매하였고, 이에 원고와 피고는 2021. 1. 6. 피고가 합의금을 지급하고 원고 측의 전적인 저작권을 인정하는 내용의 합의(이하 ‘이 사건 합의’)를 체결하였습니다. 이후 2021. 4. 1. 원고와 피고는 이 사건 전집 중 일부 도서에 관한 신규 라이선스 계약도 체결하였습니다.
원고는 피고가 아무런 권원 없이 이 사건 저작권등록을 마쳤다고 주장하며 저작권등록 말소등록절차 이행을 주위적으로, 이 사건 출판계약 또는 합의에 따른 이전등록절차 이행을 예비적으로 청구하였습니다.
2. 쟁점 정리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네 가지입니다.
가. 저작권등록 말소 청구에 소의 이익이 있는지 여부
피고는 저작권등록은 부동산등기와 달리 권리변동의 효과나 대항력이 발생하지 않으므로 말소 청구는 사실관계에 관한 청구로서 소의 이익이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저작권법 제53조, 제54조).
나. 이 사건 번역물의 저작자가 원고인지 여부
이 사건 번역물에 원고의 상호가 표시되어 있으므로 제정 저작권법 제6조에 따라 원고가 저작자로 추정되는지, 그리고 피고의 업무상저작물 주장이 인정되는지가 문제되었습니다 (저작권법 제9조).
다. 회복저작물 부칙 조항에 따라 피고가 저작권을 보유하는지 여부
이 사건 원저작물이 1995년 저작권법 개정으로 소급 보호받게 된 회복저작물이고, 이 사건 번역물이 ‘회복저작물을 원저작물로 하는 2차적저작물’에 해당하여 피고가 1996년 저작권법 부칙 제4조 제3항에 따라 저작권을 보유하는지가 문제되었습니다 (대법원 2020. 12. 10. 선고 2020도6425 판결).
라. 이 사건 합의가 착오를 이유로 취소될 수 있는지 여부
피고는 원고의 동의 없이는 이 사건 번역물을 이용할 수 없다고 착오하여 이 사건 합의를 체결하였으므로 민법 제109조 제1항에 따라 취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3. 판시 내용
가. 소의 이익 — 인정
법원은 저작권 등록에 관하여 저작자로 실명이 등록된 자는 그 등록저작물의 저작자로 추정되고 (저작권법 제53조 제1항, 제3항), 저작재산권의 양도 등은 등록하지 아니하면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없는 효력이 있으므로 (저작권법 제54조), 저작권등록 말소 청구가 온전히 사실관계에 관한 청구에 해당하여 소의 이익이 부정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피고의 본안전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나. 원고의 저작자 추정 — 인정, 피고의 업무상저작물 주장 — 기각
법원은 이 사건 번역물 색인 부분에 “© 1980 by E” 라는 기재와 ‘© E’ 문구가 하단에 기재된 K 이미지가 삽입되어 있으므로, 원고의 상호가 함께 기재되어 공표된 것으로 보아 원고가 이 사건 번역물의 저작자로 추정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피고는 “© 1980 by E”의 ‘by’가 삽입되어 있으므로 원고를 원저작물의 저작권자로 표시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법원은 제정 저작권법 제6조 제1호가 저작자의 성명을 게기하는 방법을 한정하고 있지 않고, K 이미지의 ‘© E’ 표시는 피고의 주장에 의하더라도 원고를 저작자로 표시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보아 이를 배척하였습니다.
피고의 업무상저작물 주장에 대해서는, 저작권법 제9조는 창작자 원칙에 대한 예외규정이므로 그 요건을 엄격히 심사할 필요가 있는데 (대법원 1992. 12. 24. 선고 92다31309 판결 취지), 피고는 이 사건 번역물을 편집부에서 직접 번역하였다고 주장할 뿐 업무상저작물의 요건에 관하여 구체적인 주장·입증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업무상저작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저작권법 제9조).
다. 회복저작물 부칙 조항 — 피고에게 적용 불가
법원은 1996년 저작권법 부칙 제4조 제3항이 1995. 1. 1. 이전에 작성된 회복저작물을 원저작물로 하는 2차적저작물의 ‘저작자’로 하여금 1996년 저작권법 시행 이후에도 계속하여 이용할 수 있도록 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대법원 2020. 12. 10. 선고 2020도6425 판결). 이 사건 번역물의 저작자는 원고이므로, 피고가 위 부칙 규정에 따라 계속하여 2차적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다고 볼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라. 이 사건 합의의 착오 취소 주장 — 사실상 배척
법원은 피고가 원고에게 합의금을 지급하고 원고 측의 전적인 저작권을 인정하는 내용의 합의를 체결하였다는 것은, 피고가 이 사건 번역물의 저작재산권자임을 주장한 바 없이 십수년을 지내다가 합의에 나아갔다는 점에서 착오 주장이 납득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나아가 원고와 피고가 2021. 4. 1. 체결한 라이선스 계약에서도 원고가 저작권자임을 명확히 확인하고 있다는 점을 중요하게 고려하였습니다.
마. 결론 — 저작권등록 말소 인용
법원은 이 사건 번역물의 저작자는 원고이고, 피고는 아무런 권원 없이 이 사건 저작권등록을 마친 것이므로, 피고는 이 사건 번역물의 저작자인 원고에게 이 사건 저작권등록의 말소등록절차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하여 원고의 주위적 청구를 인용하였습니다.

4. 핵심 포인트
가. 저작권등록 말소 청구는 소의 이익이 있다
이 판결은 저작권등록 말소 청구가 적법한 소송 형태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저작권등록은 저작자 추정력과 제3자 대항력이라는 법적 효과를 가지므로, 그 말소를 구하는 청구는 단순한 사실관계에 관한 청구가 아니라 법률관계에 관한 청구에 해당합니다 (저작권법 제53조, 제54조). 저작권 분쟁에서 상대방이 자신의 이름으로 저작권등록을 마친 경우, 말소등록절차 이행 청구 소송이 유효한 구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나. 업무상저작물 요건은 엄격하게 심사된다
이 판결은 저작권법 제9조의 업무상저작물 요건이 창작자 원칙에 대한 예외규정으로서 엄격하게 심사되어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하였습니다 (저작권법 제9조). 단순히 “우리 편집부가 번역했다”는 주장만으로는 부족하고, ① 법인 등의 기획 하에, ② 법인 등의 업무에 종사하는 자가, ③ 업무상 작성하고, ④ 법인 등의 명의로 공표되며, ⑤ 계약 또는 근무규칙 등에 다른 정함이 없을 것이라는 요건을 구체적으로 주장·입증하여야 합니다
다. 회복저작물 부칙 조항은 ‘저작자’에게만 적용된다
이 판결은 1996년 저작권법 부칙 제4조 제3항의 수혜자는 해당 2차적저작물의 ‘저작자’에 한정된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대법원 2020. 12. 10. 선고 2020도6425 판결). 회복저작물을 원저작물로 하는 2차적저작물을 작성하였더라도, 그 2차적저작물의 저작자가 아닌 자는 위 부칙 조항을 원용하여 계속 이용할 수 없습니다. 회복저작물 관련 분쟁에서 부칙 조항을 방어 수단으로 활용하려면 자신이 해당 2차적저작물의 저작자임을 먼저 입증하여야 합니다.
라. 합의서의 저작권 귀속 확인 조항은 강력한 증거가 된다
이 판결에서 피고의 착오 취소 주장이 배척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이 사건 합의서와 라이선스 계약서에 원고의 저작권을 명확히 인정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저작권 관련 합의나 계약을 체결할 때 저작권 귀속에 관한 조항을 명확히 기재하는 것이 이후 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마. 실무적 시사점 — 번역물 저작권 분쟁 체크리스트
| 점검 사항 | 이 사건에서의 시사점 |
|---|---|
| 저작권등록 말소 청구 | 소의 이익 인정 — 유효한 구제 수단 |
| 업무상저작물 요건 | 구체적 주장·입증 없으면 불인정 |
| 저작자 추정 | 저작물에 성명 표시 있으면 추정 발생 |
| 회복저작물 부칙 | 2차적저작물 저작자에게만 적용 |
| 합의서 저작권 조항 | 저작권 귀속 확인 조항 명시 필수 |
| 착오 취소 주장 | 장기간 권리 주장 없이 합의한 경우 인정 어려움 |
마치며 — 출판 계약서에 ‘저작권 귀속’ 조항이 없다면 지금 당장 확인하세요
이 판결은 출판 업계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는 번역물 저작권 귀속 분쟁의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줍니다. 출판사가 수십 년간 번역·출판해 온 전집의 저작권이 원저작물 출판사에게 귀속된다는 결론은, 계약서에 저작권 귀속 조항을 명확히 담아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번역물을 제작하는 출판사라면 번역 작업 단계에서부터 번역자와의 계약에 저작재산권 양도 조항을 명시하고, 원저작물 권리자와의 계약에도 번역물 저작권의 귀속 관계를 분명히 정해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체결된 합의서나 라이선스 계약서에 저작권 귀속을 인정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면, 이후 착오를 이유로 이를 번복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