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설계도면으로 재건축 인가를 받았는데, 왜 나는 한 푼도 못 받는 걸까요?” – 건축 설계 저작권
건축사 사무소가 수억 원 상당의 건축계획안을 작성해 재건축 추진위원회에 제공했지만, 법원은 용역대금도, 부당이득반환도, 저작권 침해 손해배상도 모두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요? 이 판결은 재건축 사업 과정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무계약 설계 제공’ 분쟁의 핵심 법리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1. 사실관계 요약
원고 주식회사 A는 건축설계업을 영위하는 건축사 사무소이고, 피고 B구역 주택재건축정비사업조합은 서울 서초구 C 일대에서 주택재건축정비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된 조합입니다.
피고의 전신인 이 사건 추진위원회는 2016. 10. 31. 주식회사 E(이하 ‘E’)과 신탁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원고는 이 사건 소장에서 스스로 “2016. 10.경 E으로부터 이 사건 사업의 건축계획안 설계에 관한 용역 업무를 의뢰받았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즉, 원고와 추진위원회 사이에 직접적인 계약관계가 없었고, 원고는 E과의 관계에서 이 사건 건축계획안(이하 ‘이 사건 건축계획안’)을 작성하였습니다.
이후 추진위원회는 원고가 작성한 건축계획안을 기초로 정비계획변경을 신청하였고, 2017. 7. 20. 서초구청장으로부터 정비계획변경 및 지형도면 고시를 받았습니다. 추진위원회는 2021. 1. 11. 조합설립인가를 받았고, 피고 조합이 설립되어 추진위원회의 권리·의무를 승계하였습니다.
원고는 피고를 상대로 ① 묵시적 설계용역계약에 따른 용역대금 200,100,000원(주위적 청구), ② 부당이득반환 200,100,000원(예비적 청구 1), ③ 저작권 침해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 200,100,000원(예비적 청구 2)을 청구하였으나, 법원은 이를 모두 기각하였습니다.
2. 쟁점 정리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세 가지입니다.
가. 묵시적 설계용역계약의 성립 여부
원고와 이 사건 추진위원회 사이에 명시적 계약서 없이 묵시적으로 설계용역계약이 체결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가 문제되었습니다.
나. 제3자에 대한 직접 부당이득반환청구의 가부
원고가 E과의 계약관계에 기초하여 건축계획안을 제공하였는데, 그 이익이 제3자인 피고에게 귀속된 경우 원고가 피고를 상대로 직접 부당이득반환을 청구할 수 있는지가 문제되었습니다.
다. 건축계획안의 저작물성 — 창작성 인정 여부
이 사건 건축계획안이 저작권법상 보호받는 저작물에 해당하는지, 특히 기능적 저작물인 건축저작물로서 창조적 개성이 인정되는지가 문제되었습니다.

3. 판시 내용
가. 묵시적 설계용역계약 불성립
법원은 다음과 같은 사정들을 종합하여 묵시적 설계용역계약의 성립을 부정하였습니다.
- 원고는 스스로 소장에서 E으로부터 용역을 의뢰받았다고 진술하였고, 이 사건 건축계획안은 추진위원회와 E의 업무협약 기간 중 작성되었습니다.
- 원고와 추진위원회 사이에는 별다른 거래관계나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고, 용역대금, 지급시기, 정산방법 등을 정하였다고 볼 만한 사정도 없었습니다.
- 추진위원회는 정비계획변경 신청 당시 이미 주식회사 G와 설계용역계약을 체결한 상태였으므로, 원고와 중복하여 설계용역계약을 체결할 특별한 사정이 없었습니다.
- 피고가 2021년 설계자 선정 입찰을 공고하였을 때 원고도 입찰에 참여하였으나 탈락하였는바, 이는 원고 스스로도 별도의 설계용역계약 체결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방증합니다.
나. 제3자에 대한 직접 부당이득반환청구 불가
법원은 다음과 같은 법리를 적용하여 원고의 부당이득반환청구를 기각하였습니다.
“계약상의 급부가 계약의 상대방뿐만 아니라 제3자의 이익으로 된 경우에 급부를 한 계약당사자가 그 제3자에 대하여 직접 부당이득반환청구를 할 수 있다고 보면, 자기 책임하에 체결된 계약에 따른 위험부담을 제3자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되어 계약법의 기본원리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채권자인 계약당사자가 채무자인 계약 상대방의 일반채권자에 비하여 우대받는 결과가 되어 일반채권자의 이익을 해치게 되고, 수익자인 제3자가 계약 상대방에 대하여 가지는 항변권 등을 침해하게 되어 부당하므로, 위와 같은 경우 계약상의 급부를 한 계약당사자는 이익의 귀속 주체인 제3자에 대하여 직접 부당이득반환을 청구할 수는 없다.”
원고는 E과의 계약관계에 기초하여 건축계획안을 제공하였으므로, 설령 그 결과가 피고의 이익으로 귀속되었다 하더라도 원고는 계약 상대방인 E에 대하여 대가를 청구할 수 있을 뿐, 제3자인 피고를 상대로 직접 부당이득반환을 청구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다. 건축계획안의 저작물성 불인정
법원은 건축저작물의 창작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판시하였습니다.
“건축물과 같은 건축저작물은 이른바 기능적 저작물로서, 건축분야의 일반적인 표현방법, 용도나 기능 자체, 저작물 이용자의 편의성 등에 따라 표현이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건축물이 그와 같은 일반적인 표현방법 등에 따라 기능 또는 실용적인 사상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라면 창작성을 인정하기 어렵지만, 사상이나 감정에 대한 창작자 자신의 독자적인 표현을 담고 있어 창작자의 창조적 개성이 나타나 있는 경우라면 창작성을 인정할 수 있으므로 저작물로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원고는 이 사건 건축계획안에 “사업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원고만의 아이디어가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이 사건 건축계획안 중 원고의 독자적인 사상 또는 감정의 표현을 담고 있어 창조적 개성이 드러나는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아무런 주장·증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이를 이유로 저작권 침해 손해배상청구도 기각하였습니다.
4. 핵심 포인트
가. 묵시적 계약 성립의 엄격한 요건
묵시적 계약이 인정되려면 단순히 상대방이 결과물을 활용하였다는 사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용역대금, 지급시기, 정산방법 등 계약의 주요 내용에 관한 합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객관적 사정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이 사건처럼 원고 스스로 제3자(E)로부터 용역을 의뢰받았다고 진술한 경우, 추진위원회와의 묵시적 계약 성립을 주장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나. ‘삼각관계 부당이득’의 법리 — 제3자에 대한 직접 청구 불가
이 판결에서 가장 중요한 법리는 이른바 ‘삼각관계 부당이득’ 문제입니다. A(원고)가 B(E)와의 계약에 기초하여 급부를 이행하였는데 그 이익이 C(피고)에게 귀속된 경우, A는 C를 상대로 직접 부당이득반환을 청구할 수 없습니다. A는 계약 상대방인 B에 대하여 계약상 청구를 하여야 합니다. 이는 계약법의 기본원리를 수호하고 제3자의 항변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 건축저작물의 창작성 — ‘아이디어’와 ‘표현’의 구별
저작권법은 아이디어 자체가 아니라 아이디어의 구체적 표현을 보호합니다. 원고가 “사업성을 향상시키는 아이디어가 반영되었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아이디어가 원고만의 독자적인 표현 형식으로 구현된 부분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특정하고 증명하여야 합니다. 기능적 저작물인 건축설계도서는 일반적인 표현방법에 따른 부분이 많아 창작성 인정이 더욱 엄격합니다.
라. 재건축 사업 참여 전 계약서 작성의 중요성
이 사건은 재건축 사업 과정에서 설계용역을 제공하는 건축사 사무소가 반드시 유의해야 할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누구와 계약을 체결하는지, 용역대금과 지급조건은 어떻게 정하는지를 명확히 서면으로 확정하지 않으면, 실제로 설계 결과물이 활용되더라도 법적으로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탁방식 재건축처럼 시행사(신탁사)와 추진위원회가 분리된 구조에서는 계약 당사자를 명확히 특정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마치며 — 재건축 현장의 ‘무계약 설계 제공’,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이 판결은 재건축 사업 과정에서 흔히 발생하는 ‘선(先) 설계 제공, 후(後) 계약 협상’ 관행의 법적 위험성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설계 결과물이 실제로 정비계획변경에 활용되고 조합설립인가까지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약 당사자가 누구인지 불분명하다는 이유만으로 용역대금도, 부당이득반환도, 저작권 침해 손해배상도 모두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재건축·재개발 사업에 참여하는 건축사 사무소라면, 반드시 계약 상대방을 명확히 하고, 용역대금과 지급조건을 서면으로 확정한 후 업무를 개시하는 것이 분쟁 예방의 첫걸음임을 이 판결은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