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개 거래처 명단을 USB에 담아 경쟁사로 이직했다면, 얼마를 배상해야 할까요?” 퇴사 직원이 회사의 핵심 거래처 정보를 통째로 들고 나가 경쟁사에서 활용했습니다. 거래처 명단 영업비밀
영업비밀 침해는 인정됐지만, 정작 손해배상액 산정에서 법원은 예상치 못한 방식을 택했습니다. 원고가 주장한 수억 원이 아닌, 법원이 재량으로 정한 1,500만 원.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판결은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인 ‘손해액 증명’의 현실을 정면으로 보여줍니다.

1. 사실관계 요약
원고 주식회사 A와 피고 주식회사 C는 모두 커피 생두를 수입하여 업체에 판매하는 동종 사업자입니다.
피고 B은 원고 영업팀에서 커피 생두 거래처를 확보·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다가 퇴사를 결정하였습니다. 퇴사 과정에서 기획팀 팀장 D의 지시에 따라 후임자 5명에게 인수인계를 하면서, 원고의 커피 생두 판매 365개 거래처의 명단, 대표자명,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2017년도 매출, 기준 단가, 특이사항 등이 기재된 파일(이하 ‘이 사건 파일’)을 작성하여 개인 USB에 저장한 후 가지고 나왔습니다.
피고 B은 이후 피고 회사에 입사하여 이 사건 파일을 활용해 영업 업무를 수행하였고, 이로 인해 업무상배임 및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영업비밀누설등)으로 벌금 500만 원의 형사판결이 확정되었습니다.
원고는 피고들을 상대로 영업비밀 침해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피고들은 ① 이 사건 파일은 공개된 정보이고, ② D의 허락을 받아 반출한 것이며, ③ 설령 침해가 인정되더라도 원고의 매출 감소는 원고 자신의 경영 실패에 기인한 것이라고 다투었습니다.
2. 쟁점 정리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세 가지입니다.
가. 이 사건 파일의 영업비밀 해당 여부
거래처 명단, 연락처, 매출액, 기준 단가 등이 취합된 파일이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의 영업비밀 요건(비공지성·경제적 유용성·비밀관리성)을 충족하는지가 문제되었습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나. 영업비밀 침해행위 해당 여부 및 손해배상책임의 발생
피고 B의 행위가 같은 법 제2조 제3호 (라)목의 “계약관계 등에 따라 영업비밀을 비밀로서 유지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자가 부정한 이익을 얻거나 그 영업비밀의 보유자에게 손해를 입힐 목적으로 그 영업비밀을 사용하거나 공개하는 행위”에 해당하는지가 문제되었습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3호 라목).
다. 손해배상액의 산정 방법
영업비밀 침해로 인한 손해배상액을 부정경쟁방지법 제14조의2 제1항(침해자 이익액 추정) 또는 제2항(침해자 이익액 추정)으로 산정할 수 있는지, 아니면 제5항(법원의 재량에 의한 상당한 손해액 인정)을 적용해야 하는지가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14조의2).
3. 판시 내용
가. 영업비밀 해당 여부 — 데이터베이스화의 의미
법원은 이 사건 파일의 영업비밀성을 다음과 같이 판단하였습니다.
“거래처 명단이나 연락처 등이 영업비밀성을 가진다는 것은 거래처의 정보 그 자체에 영업비밀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해당 거래처와 원고 사이에 거래 관계가 있다는 측면에서 영업비밀성이 있다는 것이다.”
개별 거래처의 상호나 연락처는 공개된 정보일 수 있지만, 365개 거래처의 명단, 매출액, 기준 단가, 특이사항 등을 모두 취합하여 데이터베이스화한 경우에는 동종 업체나 불특정 다수인이 통상 입수할 수 없는 정보로서 비공지성이 인정됩니다. 이는 대법원이 온라인 쇼핑몰 소스파일의 영업비밀성을 인정한 법리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대법원 2008. 7. 24. 선고 2007도11409 판결).
비밀관리성에 관하여는 원고가 ERP 시스템, PC 로그인 암호 관리, 보안서약서, 보안경비 및 지문인식 장치를 통해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던 점을 근거로 충족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비밀관리성은 그 정보가 비밀이라고 인식될 수 있는 표시를 하거나 고지를 하고, 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대상자나 접근 방법을 제한하거나 그 정보에 접근한 자에게 비밀준수의무를 부과하는 등 객관적으로 그 정보가 비밀로 유지·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이 인식 가능한 상태인 것을 뜻하며, 이러한 유지·관리를 위한 노력이 상당했는지는 영업비밀 보유자의 예방조치의 구체적 내용, 해당 정보에 접근을 허용할 영업상의 필요성, 영업비밀 보유자와 침해자 사이의 신뢰관계와 그 정도, 영업비밀의 경제적 가치, 영업비밀 보유자의 사업 규모와 경제적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대법원 2019. 10. 31. 선고 2017도13791 판결).
나. 영업비밀 침해행위 및 손해배상책임의 발생
법원은 피고 B이 피고 회사에 입사한 후 이 사건 파일을 사용하여 영업 업무를 수행하였으므로, 부정경쟁방지법 제2조 제3호 (라)목의 영업비밀 침해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3호 라목).
손해배상책임의 발생과 관련하여, 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시하였습니다.
“피고 B의 영업비밀 침해행위로 인하여 피고 회사와 경쟁관계에 있는 동종 업체인 원고로서는 이 사건 파일의 영업비밀성 상실에 따른 영업상 이익의 감소 내지 이 사건 파일을 취득하기 위하여 소요된 비용 상당의 재산상 손해를 입게 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영업비밀 침해행위로 영업비밀 보유자의 영업상 이익을 침해하여 손해를 입힌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집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11조).
다. 손해배상액 산정 — 제14조의2 제5항의 적용
이 판결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법원은 원고가 주장한 손해액 산정 방식, 즉 피고 회사의 이 사건 거래처들에 대한 매출액에 한계이익률을 곱한 금액을 원고의 손해액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원고의 영업상 이익 감소액을 한도로 피고 회사의 매출액에 한계이익률을 곱한 금액이 원고의 손해액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워 부정경쟁방지법 제14조의2 제1항 및 제2항을 적용할 수 없음
- 영업비밀 침해행위로 인하여 발생한 원고의 영업상 이익 감소액이나 피고 회사의 영업상 이익에 이 사건 파일의 각 정보가 기여한 정도를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매우 곤란함
이에 법원은 부정경쟁방지법 제14조의2 제5항을 적용하여 변론 전체의 취지와 증거조사 결과를 참작하여 원고의 손해액을 1,500만 원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14조의2).
라. 피고 회사의 사용자책임
법원은 피고 B의 영업비밀 침해행위가 외형상 객관적으로 사용자인 피고 회사의 사무집행과 관련성이 있고, 피고 회사가 피고 B의 선임 및 사무감독에 상당한 주의의무를 다하였음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보아, 피고 회사의 사용자책임도 인정하였습니다.

4. 핵심 포인트
가. 거래처 정보의 영업비밀성 — ‘데이터베이스화’가 핵심
개별 거래처의 상호나 전화번호는 공개된 정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백 개의 거래처 정보를 매출액, 기준 단가, 특이사항 등과 함께 취합하여 데이터베이스화한 경우에는 그 자체로 비공지성과 경제적 유용성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이 판결은 거래처 명단의 영업비밀성이 ‘개별 정보의 공개 여부’가 아니라 ‘거래 관계의 존재 및 정보의 집합적 가치’에 있음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대법원 2019. 10. 31. 선고 2017도13791 판결 참조).
나. 손해배상액 산정의 3단계 구조
부정경쟁방지법 제14조의2는 손해액 산정에 관하여 단계적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14조의2).
| 조항 | 내용 | 이 사건 적용 여부 |
|---|---|---|
| 제1항 | 침해자의 이익액을 피해자의 손해액으로 추정 | 적용 불가 — 이익 기여도 증명 곤란 |
| 제2항 | 통상 받을 수 있는 금액(실시료 상당액) | 적용 불가 — 산정 근거 부족 |
| 제5항 | 법원의 재량에 의한 상당한 손해액 인정 | 적용 — 1,500만 원 인정 |
이 판결은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손해액 증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제5항이 실질적인 안전망으로 기능함을 확인하였습니다.
다. 사용자책임의 적극적 활용
피고 회사가 피고 B의 영업비밀 침해행위를 직접 지시하거나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사용자책임(민법 제756조)을 통해 피고 회사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가 가능합니다. 이는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자력이 부족한 개인 피고만을 상대로 하는 것보다 법인을 함께 피고로 삼는 전략적 의미를 가집니다.
라. 형사판결 확정의 민사소송에서의 의미
피고 B에 대한 형사판결(벌금 500만 원)이 확정된 사실은 민사소송에서 영업비밀 침해 사실 자체를 인정하는 데 중요한 증거로 활용되었습니다. 형사·민사 병행 전략의 실효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마치며 — 영업비밀 침해 소송, ‘침해 증명’보다 ‘손해액 증명’이 더 어렵다
이 판결은 영업비밀 침해 소송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줍니다. 침해 사실은 형사판결로 이미 확정되었고, 민사소송에서도 영업비밀성과 침해행위가 모두 인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손해배상액은 원고가 주장한 금액에 훨씬 못 미치는 1,500만 원에 그쳤습니다.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준비하는 실무에서는 침해 사실의 입증 못지않게, 피고의 매출 자료 확보, 한계이익률 산정 근거 마련, 원고의 매출 감소와 침해행위 사이의 인과관계 입증 등 손해액 산정을 위한 치밀한 준비가 필수적입니다. 부정경쟁방지법 제14조의2 제5항은 최후의 안전망이지만, 그것에만 의존하면 실질적인 피해 회복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