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제품 제공 영업비밀 침해? – 역설계 가능성

“도면을 유출한 것도 아니고, 완성된 제품을 잠깐 빌려줬다가 돌려받았을 뿐입니다. 그게 어떻게 영업비밀 침해가 됩니까?” 영업비밀 침해 분쟁에서 흔히 등장하는 항변입니다. 그러나 완제품 제공 영업비밀 침해입니다.
이 판결은 완제품 자체에 기술정보가 화체(化體)되어 있고, 역설계를 통해 기술정보를 밝혀낼 수 있다면 완제품을 제공하는 행위 자체가 영업비밀의 사용 또는 공개에 해당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도면 한 장 건네지 않아도 영업비밀 침해가 성립할 수 있다는 이 판결의 핵심 법리를 지금 확인해 보겠습니다.

완제품 제공 영업비밀 침해
완제품 제공 영업비밀 침해

사실관계 요약

채권자 주식회사 A는 반도체 제조장치 등을 생산하는 회사로, 반도체 세정장비의 핵심 구성부품인 스핀 척(spin chuck)에 관한 기술정보(이하 ‘이 사건 기술정보’)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채무자 B는 2011년경부터 특수목적용 기계제조업을 운영하면서 2015년경부터 채권자의 1차 협력사인 주식회사 D로부터 스핀 척 제작 공정을 하도급받아, D로부터 제공받은 이 사건 기술정보를 이용하여 스핀 척을 제작하고 이를 D를 통해 전량 채권자에게 납품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채권자의 전직 직원 F와 F이 설립한 G 주식회사 등이 조직적으로 채권자의 기술자료를 부정취득하여 중국업체에 이전한 행위에 관한 형사사건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채무자는 2019년 F로부터 “D에 납품하는 가격보다 2~3배 높은 대금을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받고, 직원들에게 지시하여 이 사건 기술정보를 사용하여 스핀 척 12개를 제작한 후 이를 G에 납품하였습니다.

채권자는 채무자를 상대로 영업비밀 침해금지 등 가처분을 신청하였고, 채무자는 ① 이 사건 기술정보는 영업비밀 요건을 갖추지 못하였고, ② 스핀 척 완제품을 대여하였다가 반납받았을 뿐 판매한 사실이 없으며, ③ 완제품 대여·반납 행위는 기술정보의 사용 또는 공개가 아니라고 항변하였습니다.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은 2023. 10. 11. 채권자의 신청을 인용하였습니다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2023. 10. 11. 선고 2023카합10016 판결).

쟁점 정리

첫째, 이 사건 기술정보가 영업비밀에 해당하는가 — 특허 출원·공개와 비공지성의 관계

채권자가 스핀 척에 관한 특허를 출원하여 특허공보에 스핀 척의 평면도, 단면도 및 주요 구성 부분의 확대도 등이 게시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특허 출원·공개가 있으면 해당 기술정보의 비공지성이 상실되는지가 쟁점이었습니다. 영업비밀의 비공지성이란 그 정보가 간행물 등의 매체에 실리는 등 불특정 다수인에게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보유자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그 정보를 통상 입수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대법원 2008. 2. 15. 선고 2005도6223 판결).

둘째, 완제품을 제공한 행위가 영업비밀의 ‘사용 또는 공개’에 해당하는가

채무자는 도면이나 기술자료를 직접 제공한 것이 아니라 완성된 스핀 척 제품을 G에 제공하였다가 반납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완제품 자체는 기술정보가 아니므로 완제품 제공 행위가 영업비밀의 ‘사용 또는 공개’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채무자의 핵심 항변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완제품에 기술정보가 화체되어 있어 역설계를 통해 기술정보를 밝혀낼 수 있는 경우에도 완제품 제공이 영업비밀 침해에 해당하는지가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제3호).

셋째, 채권자의 스핀 척 중고품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으므로 비공지성이 상실되었는가

채무자는 채권자의 스핀 척 중고품이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에 매물로 등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 사건 기술정보의 비공지성이 상실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일회적인 중고거래 사실만으로 비공지성이 상실되는지가 쟁점이었습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완제품 제공 영업비밀 침해-역설계 가능성
완제품 제공 영업비밀 침해-역설계 가능성

판시 내용

가. 이 사건 기술정보의 영업비밀 해당성 — 인정

법원은 다음과 같은 사정들을 종합하여 이 사건 기술정보가 영업비밀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비공지성: 채권자가 스핀 척에 관한 특허를 출원하여 특허공보에 스핀 척의 평면도, 단면도 및 주요 구성 부분의 확대도 등이 게시된 사실은 인정되나, 이는 이 사건 스핀 척의 구조 및 형상과 동일하지 않고, 특허공보에는 개별 부품의 상세 구조, 수치, 재질 등의 정보는 기재되어 있지 않으므로 특허의 존재만으로 이 사건 기술정보가 공지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또한 개별부품 도면 중에 시중에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부품에 관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개별부품이 채권자의 스핀 척 제작에 필요한 최적화된 구성품으로서 특정되어 공지된 것은 아니므로 개별부품 도면에 대해서도 비공지성이 인정됩니다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2023. 10. 11. 선고 2023카합10016 판결).

경제적 유용성: 이 사건 기술정보는 채권자가 막대한 연구비를 투입하여 개발한 반도체 세정장비의 구성부분인 스핀 척이 최적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한 도면으로서, 독립된 경제적 가치를 가집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비밀관리성: 채권자는 이 사건 기술정보를 비밀로 관리하여 왔습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나. 중고품 유통에 의한 비공지성 상실 주장 — 배척

법원은 채권자의 스핀 척이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에 매물로 등록되어 있었던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비공지성 상실 주장을 배척하였습니다.

① 채권자는 이 사건 스핀 척이 장착된 세정장비를 C 등 K 계열사에만 독점적으로 납품하고 있습니다.

② 개별 스핀 척마다 구체적인 구매 요청자 정보, 납품 일자 등이 표시되어 있으며, C는 사용완료된 개별 스핀 척의 폐기 정보를 관리하고 있어 이 사건 스핀 척은 채권자 등이 개별상품으로서 유통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사용 및 폐기 과정까지도 추적·관리되고 있습니다.

③ 따라서 채무자가 제출한 일회적 중고거래 관련 자료만으로는 채권자의 스핀 척 중고품이 합법적인 경로를 통하여 일반적으로 유통된다고 보기에 부족합니다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2023. 10. 11. 선고 2023카합10016 판결, 대법원 1996. 12. 23. 선고 96다16605 판결).

다. 완제품 제공 행위의 영업비밀 침해 해당성 — 인정 (핵심 판시)

이 판결의 가장 중요한 판시 부분입니다. 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단하였습니다.

이 사건 스핀 척에는 그 개별부품 및 조립에 관한 정보가 화체되어 있으므로, 이 사건 스핀 척을 취득하면 역설계 등을 통하여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이 사건 기술정보를 어느 정도 밝혀낼 수 있고, 적어도 스핀 척 개발에 이르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채무자가 반도체 세정장비 제작을 시도하던 G에게 이 사건 스핀 척을 제공한 행위는 G로 하여금 스핀 척 제작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현저히 절약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서 이 사건 기술정보의 사용 또는 공개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합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제3호,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2023. 10. 11. 선고 2023카합10016 판결).

이는 대법원이 야간투시경의 완제품과 부품을 취득하거나 사용한 행위도 영업비밀 침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법리와 궤를 같이 합니다 (대법원 2017. 9. 26. 선고 2015도13931 판결).

핵심 포인트 — 반드시 알아야 할 4가지

① 특허 출원·공개가 있더라도 특허공보에 기재되지 않은 세부 기술정보는 비공지성이 유지됩니다.

이 판결에서 법원은 특허공보에 스핀 척의 개략적인 도면이 게시되어 있더라도, 개별 부품의 상세 구조, 수치, 재질 등의 정보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면 특허의 존재만으로 비공지성이 상실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특허 출원 시 공개되는 정보의 범위와 영업비밀로 보호받는 정보의 범위는 다를 수 있으므로, 특허 출원 후에도 공개되지 않은 세부 기술정보는 영업비밀로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② 완제품에 기술정보가 화체되어 있고 역설계가 가능하다면, 완제품 제공 행위도 영업비밀 침해입니다.

이 판결의 핵심 법리입니다. 도면이나 기술자료를 직접 제공하지 않더라도, 완제품 자체에 기술정보가 화체되어 있어 역설계를 통해 기술정보를 밝혀낼 수 있거나 개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면 완제품 제공 행위는 영업비밀의 사용 또는 공개에 해당합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3호). 이는 대법원이 야간투시경 완제품·부품의 취득·사용도 영업비밀 침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법리와 일치합니다 (대법원 2017. 9. 26. 선고 2015도13931 판결).

③ ‘대여 후 반납’이라는 형식은 영업비밀 침해 여부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채무자는 스핀 척을 판매한 것이 아니라 대여하였다가 반납받았을 뿐이라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이러한 형식적 구분에 관계없이 완제품을 제공하여 상대방이 역설계를 통해 기술정보를 취득하거나 개발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게 하였다면 영업비밀 침해가 성립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3호). 영업비밀 침해 여부는 행위의 형식이 아닌 실질적인 효과를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④ 일회적인 중고거래 사실만으로는 비공지성이 상실되지 않습니다.

이 판결에서 법원은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에 매물이 등록된 사실이 있더라도, 해당 제품이 독점적으로 납품되고 사용·폐기 과정까지 추적·관리되고 있다면 일회적 중고거래 관련 자료만으로는 합법적인 경로를 통한 일반적 유통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영업비밀 보유자는 제품의 유통 경로와 폐기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함으로써 비공지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대법원 1996. 12. 23. 선고 96다16605 판결).

기업 영업비밀 김정민 변호사
기업 영업비밀 김정민 변호사

마치며 — “도면을 건네지 않아도 제품을 건네면 기술을 건넨 것입니다”

이 판결은 영업비밀 침해의 범위를 기술자료의 직접 유출에 한정하지 않고, 완제품에 화체된 기술정보의 역설계 가능성까지 고려하여 완제품 제공 행위도 영업비밀 침해로 인정한 중요한 판결입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① 핵심 기술이 화체된 완제품의 유통 경로와 폐기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② 협력사에 대한 기술정보 제공 시 비밀유지계약을 반드시 체결하며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제12조의3 제3항), ③ 특허 출원 시 공개되지 않는 세부 기술정보는 별도로 영업비밀로 관리하고, ④ 완제품 제공 행위도 영업비밀 침해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여 협력사 관리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도면 한 장 건네지 않아도 완성된 제품 하나를 건네는 것으로 수년간의 연구개발 성과가 경쟁자의 손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영업비밀 보호는 기술자료 관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완제품의 유통 경로까지 관리하는 것이 진정한 영업비밀 보호입니다.”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2023. 10. 11. 선고 2023카합10016 판결, 대법원 2017. 9. 26. 선고 2015도13931 판결, 대법원 1996. 12. 23. 선고 96다16605 판결, 대법원 2008. 2. 15. 선고 2005도6223 판결,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제3호, 제10조, 제11조, 제18조,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제12조의3 제3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