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콤 설치 비밀유지서약 영업비밀이 아닐까?-변호사 생각

“30년 넘게 개발한 기술, 직원이 빼돌렸는데 영업비밀이 아니라니요?”-비밀유지서약 영업비밀 분쟁
1980년대 후반부터 수십 년간 공들여 개발한 산업용 설비 기술이 있습니다. 사업장에는 세콤시스템을 설치했고, 직원들과는 근로계약서에 기밀유지 조항도 넣었습니다. 그런데 핵심 설계 담당 직원이 퇴사하면서 설계도면을 통째로 들고 나가 경쟁사 제품을 만드는 데 사용했습니다. 당연히 영업비밀 침해라고 생각했는데, 법원은 “영업비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억울하지만, 이 판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법원은 다른 경로로 피고들의 책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영업비밀 보호와 부정경쟁행위 규제가 어떻게 다르게 작동하는지, 이 판결이 그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세콤 설치 비밀유지서약-영업비밀
세콤 설치 비밀유지서약-영업비밀

1. 사실관계 요약

원고 주식회사 A는 1980년대 후반부터 하수·폐수처리장 및 정수장 등에서 발생하는 슬러지를 탈수하는 설비인 벨트프레스를 제작·판매해온 회사입니다. 1992년경에는 압축 기능이 더욱 뛰어난 고압 벨트프레스를 개발하는 등 해당 분야에서 오랜 기술 축적을 이루어왔습니다.

피고 주식회사 B는 2019년경부터 벨트프레스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제품은 피고 회사의 베트남 법인에서 제작되었습니다. 피고 회사의 대표이사이자 베트남 법인의 대표자인 피고 D는 원고의 설계실에서 근무하던 소외 E에게 피고 회사로 이직하여 원고의 벨트프레스를 그대로 모방한 제품을 설계·제작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E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원고의 벨트프레스 설계도면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일부를 변형하여 피고 벨트프레스의 설계도면을 완성하였고, 피고 회사 및 베트남 법인은 이 설계도면을 사용하여 피고 벨트프레스를 제작·판매하였습니다.

원고는 피고들을 상대로 영업비밀 침해부정경쟁방지법 제2조 제1호 (파)목의 부정경쟁행위를 이유로 침해금지, 폐기 및 손해배상을 청구하였습니다. 법원은 영업비밀 침해 주장은 기각하였으나, (파)목 부정경쟁행위에 기한 청구는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2. 쟁점 정리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두 가지였습니다.

가. 벨트프레스 설계도면이 영업비밀에 해당하는가?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상 영업비밀로 인정받으려면 ①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 않을 것(비공지성), ② 독립된 경제적 가치를 가질 것(경제적 유용성), ③ 비밀로 유지·관리되고 있을 것(비밀관리성)이라는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합니다.

이 사건에서는 특히 비밀관리성 요건이 충족되었는지가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원고는 근로계약서의 기밀유지 조항과 세콤시스템 설치를 비밀관리의 근거로 주장하였습니다.

나. (파)목 부정경쟁행위에 해당하는가?

부정경쟁방지법 제2조 제1호 (파)목은 타인의 상당한 투자나 노력으로 만들어진 성과 등을 공정한 상거래 관행이나 경쟁질서에 반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영업을 위하여 무단으로 사용함으로써 타인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를 부정경쟁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영업비밀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더라도 이 조항에 의한 보호가 가능한지가 두 번째 쟁점이었습니다.

세콤 비밀유지서약-영업비밀침해
세콤 비밀유지서약-영업비밀침해

3. 판시 내용

가. 영업비밀 해당 여부 — 비밀관리성 불인정

법원은 먼저 적용 법률에 관하여, 영업비밀 침해행위를 원인으로 하는 손해배상청구에 대해서는 침해행위 시를 기준으로 시행 중인 법률이 적용되고, 금지청구에 대해서는 사실심 변론종결 시에 시행 중인 법률이 적용된다고 판시하였습니다.

이어서 법원은 비밀관리성 요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판단하였습니다.

① 설계도면의 관리 실태: 원고의 벨트프레스 설계도면은 직원들이 자유롭게 복제·공유하였으며, ‘대외비’나 ‘보안유지’와 같은 표시도 없었고, 영업비밀 관리와 관련된 별도의 교육도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② 기밀유지 조항의 한계: 원고와 E 사이의 근로계약서에 기재된 기밀유지 조항은 ‘원고와 관련한 정보 또는 업무수행과정에서 직원이 습득한 모든 정보’가 기밀로 유지된다는 취지의 일반적인 조항에 불과하여, 이와 같은 조항만으로 원고 벨트프레스 설계도면이 비밀로 유지되었다거나 관리되었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하였습니다.

③ 세콤시스템의 한계: 세콤시스템은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하는 역할만을 할 뿐 원고 직원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 자체로 설계도면이 비밀로 유지·관리되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판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정들을 종합하여 법원은 이 사건 원고 기술정보가 비밀로 유지되었다거나 비밀로 관리되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나. (파)목 부정경쟁행위 — 인정

법원은 영업비밀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더라도 (파)목 부정경쟁행위는 별도로 성립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시하였습니다.

“이 사건 기술정보는 E가 원고에 재직할 당시 비밀로 관리되었거나 유지되었다고 인정하기는 어려우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원고가 이를 외부에 공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원고는 고성능의 벨트프레스를 설계·제작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과 투자를 하는 등 적어도 원고의 중요한 자산에는 해당한다고 봄이 타당함.”

이를 근거로 법원은 피고 회사 및 베트남 법인이 원고의 상당한 투자나 노력으로 만들어진 성과에 해당하는 기술정보를 공정한 상거래 관행이나 경쟁질서에 반하는 방법으로 무단으로 사용하여 원고와 동일·유사한 제품을 제작·판매함으로써 원고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였다고 보아 (파)목 부정경쟁행위를 인정하고, 이에 기한 금지 및 폐기청구, 손해배상청구를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기업 영업비밀 김정민 변호사 프로필
기업 영업비밀 김정민 변호사 프로필

4. 핵심 포인트

이 판결에서 실무적으로 반드시 기억해야 할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분내용
영업비밀 비밀관리성의 핵심일반적 기밀유지 조항과 세콤시스템만으로는 비밀관리성 요건 불충족 — 구체적·개별적 관리 조치가 필요
비밀관리성 충족을 위한 실무 조치도면에 ‘대외비’ 표시, 접근 권한 제한, 정기적 보안교육, 특정 정보에 대한 개별적 비밀유지서약 등 필요
세콤시스템의 한계외부인 접근 차단 효과만 있을 뿐, 내부 직원의 무단 반출을 막는 수단으로는 인정되지 않음
(파)목의 보완적 기능영업비밀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더라도, 상당한 투자·노력으로 만들어진 성과를 무단 사용한 경우 (파)목 부정경쟁행위로 보호 가능
영업비밀 vs. (파)목의 차이영업비밀은 비밀관리성 요건이 엄격하게 요구되나, (파)목은 비밀관리성 없이도 성과의 무단 사용만으로 성립 가능
손해배상 적용 법률손해배상청구 — 침해행위 시 시행 법률 적용 / 금지청구 — 사실심 변론종결 시 시행 법률 적용

기술을 지키고 싶다면, 관리의 흔적을 남기세요

이 판결이 기업 법무 담당자와 경영진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우리 회사 정보는 모두 비밀”이라는 포괄적 선언만으로는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정보가 비밀인지 특정하고, 그 정보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며, 직원들이 그것이 비밀임을 인식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관리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다행히 이 사건에서 원고는 (파)목 부정경쟁행위라는 또 다른 법적 수단을 통해 일부 구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업비밀로 인정받았을 때와 비교하면 보호의 범위와 강도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핵심 기술 정보가 있다면 지금 당장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해당 정보에 ‘대외비’ 표시가 되어 있는지, 접근 권한이 제한되어 있는지, 직원들이 그 정보의 비밀성을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퇴직 시 반환 절차가 마련되어 있는지를 확인하세요. 기술을 개발하는 노력만큼, 그것을 지키는 관리의 흔적도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