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계좌가 보이스피싱에 이용됐다는 이유로 지급정지까지 당했는데, 억울하다면 소송을 내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 소송에서 내가 직접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자화폐거래소를 운영하던 원고 회사가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을 상대로 제기한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에서, 통상적인 금전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의 증명책임 법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원고에게 정당한 권원에 의한 취득 사실을 직접 증명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원고는 이를 증명하지 못하여 피해자들에 대한 청구가 모두 기각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이 판결의 핵심 쟁점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시면 다음 정보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① 통신사기피해환급법상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에서 계좌 명의인과 피해자 중 누가 증명책임을 부담하는지
② 일반적인 금전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의 증명책임 법리가 이 사건에서 그대로 적용되지 않은 이유
③ 전자화폐거래소 운영자가 ‘정당한 권원에 의한 취득’을 증명하기 위해 갖춰야 할 자료의 수준
④ 보이스피싱 피해금이 입금된 계좌에 전자금융거래제한 조치까지 내려지는 법적 구조
⑤ 법원이 원고의 전자화폐 거래대금 주장을 배척한 구체적 이유 8가지

1. 사실관계 요약 — 당사자가 직면한 위기
가. 사건의 경위
원고는 전자상거래·통신판매업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회사로, P2P 방식의 전자화폐거래소를 운영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피고들(B, C, D, 망 E의 상속인들, I, J, K)은 2024. 8. 22.경부터 2024. 8. 26.경까지 금융기관 직원, 금융감독원 직원, 검사 등을 사칭하는 사람들의 지시에 따라 합계 수억 원에 이르는 금원을 1차 수취인 계좌로 이체하였고, 이 피해금의 대부분은 다시 원고 명의 V은행 계좌로 이체되었습니다.
원고 계좌에 입금된 피해금은 입금 후 약 30분 이내에 대부분 ‘P’ 명의 계좌로 출금되었습니다. 피고들이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따라 피해구제를 신청하자 원고 계좌에 대한 지급정지 및 전자금융거래제한 조치가 이루어졌고, 채권소멸절차가 진행될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나. 당사자들이 직면한 위기
| 구분 | 내용 |
|---|---|
| 원고의 위기 | 계좌 지급정지·전자금융거래제한 조치를 받고 채권소멸절차까지 진행될 위기에 처한 상황. 전자화폐 거래대금으로 입금된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 증거가 부족한 상황 |
| 피고들(피해자)의 위기 | 보이스피싱으로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원고가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채권소멸절차가 중단되고 피해금 환급이 지연되는 상황 |
| 핵심 쟁점 | 이 소송에서 증명책임을 누가 부담하는지, 원고의 전자화폐 거래대금 주장이 인정될 수 있는지 여부 |
2. 핵심 쟁점 Q&A
Q1. 통신사기피해환급법상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이란 무엇이고, 왜 제기하나요?
A.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은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소송 없이 피해금을 신속하게 돌려받을 수 있도록 지급정지·채권소멸·피해금 환급 절차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피해자가 피해구제를 신청하면 금융회사는 사기이용계좌에 즉시 지급정지 조치를 하고, 개시 공고일로부터 2개월이 경과하면 명의인의 채권은 소멸합니다.
그런데 정당한 상거래 대금을 입금받았음에도 사기이용계좌로 지정되거나 허위 신고로 지급정지 조치가 이루어지는 부작용이 발생하자, 2018년 법 개정을 통해 계좌 명의인이 피해자를 상대로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마련되었습니다. 이 소송이 법원에 계속 중인 경우 채권소멸절차 진행이 배제되고, 피해금을 초과하는 부분에 대한 지급정지 조치도 해제됩니다. 원고는 바로 이 규정을 근거로 피해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Q2. 일반적인 금전채무부존재확인 소송에서는 누가 증명책임을 지나요?
A. 일반적인 금전채무부존재확인 소송에서는 채무자인 원고가 먼저 청구를 특정하여 채무 발생 원인사실을 부정하는 주장을 하면, 채권자인 피고가 그 권리관계의 요건사실에 관하여 증명책임을 부담합니다. 원고는 이 법리를 근거로, 피고들이 원고의 손해배상채무 또는 부당이득반환채무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근거한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에서는 이 법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 질문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Q3. 왜 이 사건에서는 일반적인 증명책임 법리가 적용되지 않나요?
A. 법원은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명의인인 원고가 직접 정당한 권원에 의한 취득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첫째,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의 입법 목적이 피해자 보호에 있으므로, 이 법에 근거한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은 그 목적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 해석·운영되어야 합니다.
둘째, 피해자에게 증명책임을 부담시키면 수사기관이 밝혀야 할 범죄사실과 피해금 이동경로를 피해자가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불합리가 발생하고, 명의인의 채무부존재확인 청구가 쉽게 인용되어 입법 목적이 사실상 몰각됩니다.
셋째, 전기통신금융사기는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피해금이 여러 계좌를 거쳐 이동하기 때문에 피해자가 피해금 이동경로를 추적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 사건에서도 피해 발생 후 약 1년 6개월이 지났음에도 수사가 진행 중일 뿐 범인과 피해금 이동경로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넷째, 통신사기피해환급법 제7조 제1항은 명의인의 이의제기 절차에서 명의인이 스스로 정당한 권원을 소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이 이의제기 절차보다 증명 부담이 가볍다면 명의인이 이의제기 절차를 외면하고 소송만 제기하게 되어 이의제기 절차가 형해화될 우려가 있습니다.
다섯째, 명의인은 자기 계좌에 입금된 금원이 누구로부터 어떤 법률적 원인으로 입금된 것인지 증명하는 것이 가능한 반면, 피해자는 이를 알 수 없으므로 명의인에게 증명책임을 부담시키는 것이 구체적 타당성의 관점에서도 합리적입니다.
Q4. 원고는 어떤 증거를 제출하였고, 왜 인정받지 못했나요?
A. 원고는 이 사건 송금인들과 수취인의 회원가입 상세정보 캡처화면과 거래정보 캡처화면을 증거로 제출하며, 입금된 금원이 전자화폐 ‘R’ 구매대금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를 배척하였습니다.
원고가 전자화폐거래소를 폐업하여 홈페이지 접속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캡처화면만으로는 실제 회원가입 여부, 실명 확인 절차 이행 여부, 실제 거래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회원 상세정보에는 이름과 이메일 주소만 있을 뿐 생년월일·주소·성별·국적 등 인적사항을 특정할 수 있는 기본정보가 전혀 없어 실제 존재하는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나아가 원고의 법인등기부등본과 사업자등록증에 전자화폐거래소가 영업 목적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았고, 전자화폐거래소 개설 시점, 폐업 경위, 관련 법령상 신고·등록 절차 이행 여부, 매출·영업이익 규모, 인적·물적 설비 구비 여부에 관한 구체적 주장·증명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자화폐 ‘R’의 시장가치, 거래규모, 상장 여부도 전혀 특정되지 않았습니다.
Q5. 원고 계좌의 거래 패턴은 어떤 의미를 가졌나요?
A. 법원은 원고 계좌의 거래 패턴도 중요한 판단 근거로 삼았습니다. 피해금이 입금되기 전까지 원고 계좌의 입출금은 주로 1,000만 원 미만이었고 횟수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24. 8. 20.경 이후부터 한 번에 수천만 원에 이르는 금원이 계속적으로 입금되고, 입금 후 약 30분 이내에 대부분이 출금되는 패턴이 반복되었습니다.
법원은 설령 원고가 전자화폐거래소를 정상적으로 운영하였다는 주장이 사실이더라도, 전자화폐거래소 운영자로서 통상의 주의만 기울였더라면 비정상적 자금이 계속 입금되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원고 계좌에 이 사건 피해금 외에도 다른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금이 여러 건 송금되었다는 점도 이 판단을 뒷받침하였습니다.
Q6. 원고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려 하였고,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A. 원고는 두 가지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소송 단계에서는 일반적인 금전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의 증명책임 법리를 원용하여 피해자들이 손해배상채무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항소심에서는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주장을 선택적으로 추가하는 방식으로 청구 근거를 다양화하려 하였습니다. 실체적으로는 전자화폐 거래대금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캡처화면 등을 증거로 제출하였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증명책임 주장을 배척하고 원고에게 정당한 권원 증명 책임을 부담시켰으며,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이를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결국 피고 I에 대한 청구만 자백간주로 인용되었을 뿐, 나머지 피해자들에 대한 청구는 모두 기각되었습니다. 원고는 다른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을 상대로 제기한 유사 소송에서도 소각하 판결을 받은 바 있습니다.

마치며
“그렇다면 전자화폐거래소나 가상자산 관련 사업자가 보이스피싱 피해금 통로로 이용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갖춰야 할까요?” 이 판결은 명확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계좌에 입금된 금원이 정당한 거래대금임을 증명하려면 회원 실명 확인 자료, 거래 원장, 사업자등록 및 관련 법령상 신고·등록 서류, 실제 전자화폐 교부 내역 등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자료가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폐업 후 홈페이지 접속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캡처화면만 제출하는 것은 증명으로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나아가 이 판결은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근거한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에서는 명의인이 직접 정당한 권원을 증명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보이스피싱 피해금이 자신의 계좌를 거쳐 간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 어렵다면, 그 입금이 정당한 거래에 기반한 것임을 처음부터 입증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유일한 방어 수단임을 이 판결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