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정상적인 전자화폐 거래소를 운영했을 뿐인데,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제 계좌를 지급정지시켰습니다. 억울하지 않나요?” – 보이스피싱 피해금과 계좌 지급정지 분쟁
이 질문, 언뜻 들으면 피해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26. 5. 8. 선고 2024가합101778 판결은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금이 유입된 계좌의 명의인이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을 제기할 때 누가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법리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와 사기이용계좌 명의인 사이의 법적 공방,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사실관계 요약 — 당사자가 직면한 위기와 문제
가. 보이스피싱 피해금의 이동 경로
피고들(B, C, D, 망 E의 상속인들, I, J, K)은 2024년 8월 22일경부터 같은 달 26일경까지 금융기관 직원, 금융감독원 직원, 검사 등을 사칭하는 사람들의 지시에 따라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이르는 금원을 특정 계좌로 이체하였습니다. 전형적인 보이스피싱 범행의 피해자들입니다.
이 사건 피해금의 대부분은 중간 계좌를 거쳐 원고 주식회사 A 명의의 V은행 계좌(이하 ‘원고 계좌’)로 이체되었고, 원고 계좌에 입금된 금원은 입금 후 약 30분 이내에 ‘P’ 명의 계좌로 대부분 출금되었습니다. 피고들이 입금한 피해금 총액은 수억 원에 달하였습니다.
나. 지급정지와 원고가 직면한 위기
피고들이 2024년 8월 말경부터 9월경까지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따라 사기이용계좌의 지급정지를 요청하는 피해구제를 신청하자, 연쇄적인 지급정지 조치가 이루어졌고 원고 계좌도 지급정지되었습니다.
원고가 직면한 위기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지급정지에 이어 채권소멸절차가 진행될 위험이었습니다.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따르면 지급정지 후 채권소멸절차 개시 공고일로부터 2개월이 경과하면 명의인의 채권이 소멸합니다. 원고 계좌에 남아 있는 잔액이 사라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둘째, 전자금융거래제한 조치까지 이루어졌습니다. 이 조치는 전기통신금융사기와 관련한 형사처벌 전력이 있는 경우에만 이루어지는 것인데, 원고는 이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 원고의 대응 전략
원고는 자신이 ‘P2P 방식의 전자화폐 거래소’를 운영하는 회사로서, 원고 계좌에 입금된 금원은 전자화폐 ‘R(S)’ 구매대금으로 입금된 것이고 보이스피싱 범행과 무관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통신사기피해환급법 제4조의2 제2항, 제5조 제1항 제5호, 제8조 제1항 제1의2호에 근거하여 피해자인 피고들을 상대로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이 법원에 계속 중인 경우 채권소멸절차 진행이 배제되고 지급정지 조치도 일부 종료되는 법적 효과를 노린 것입니다.
2. 핵심 쟁점
Q1. 통신사기피해환급법상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이란 무엇인가요?
A.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은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자가 소송 없이 피해금을 신속하게 돌려받을 수 있도록 지급정지 → 채권소멸절차 → 피해환급금 지급의 절차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당한 상거래 대금을 입금받았음에도 사기이용계좌로 지정되거나, 허위 신고로 지급정지가 이루어지는 등 명의인이 부당한 피해를 입는 사례가 발생하자, 2018년 법 개정을 통해 명의인이 피해자를 상대로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마련되었습니다.
이 소송이 법원에 계속 중인 경우에는 채권소멸절차 진행이 배제되고, 피해금을 초과하는 부분에 대한 지급정지 조치도 종료됩니다. 즉, 명의인이 자신의 법적 불이익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Q2. 이 소송에서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무엇이었나요?
A.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증명책임의 소재였습니다. 원고와 피고들의 주장이 정면으로 충돌하였습니다.
| 원고의 주장 | 피고들(법원)의 판단 |
|---|---|
| 금전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의 일반 법리에 따라 채권자인 피고들이 손해배상채무 또는 부당이득반환채무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근거한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에서는 일반 법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고, 명의인인 원고가 이의제기 사유(정당한 권원에 의한 취득)를 주장·증명해야 한다 |
법원은 원고의 주장을 배척하고, 이 사건에서는 명의인인 원고가 원고 계좌에 입금된 금원을 재화 또는 용역의 공급에 대한 대가로 받았거나 그 밖에 정당한 권원에 의하여 취득하였다는 사실을 주장·증명해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Q3. 법원은 왜 일반적인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의 증명책임 법리를 적용하지 않았나요?
A. 법원이 일반 법리의 적용을 배제한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였습니다.
첫째, 입법 목적의 문제입니다.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은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자가 소송 없이 피해금을 신속하게 돌려받을 수 있도록 제정된 법률입니다. 피해자에게 증명책임을 부담시키면 이 목적이 정면으로 훼손됩니다.
둘째, 전기통신금융사기의 특수성입니다. 이 범죄는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피해금이 여러 계좌를 거쳐 이동하기 때문에 피해자가 피해금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거나 명의인의 책임을 입증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피해 발생 후 약 1년 6개월이 경과하도록 수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셋째, 증명 가능성의 불균형입니다. 피해자는 자신의 돈이 어떤 경로로 명의인 계좌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지만, 명의인은 자기 계좌에 누가 왜 입금하였는지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명의인에게 증명책임을 부담시키는 것이 구체적 타당성 측면에서도 합리적입니다.
넷째, 이의제기 절차와의 균형입니다. 통신사기피해환급법 제7조 제1항은 명의인이 이의제기를 할 때 정당한 권원에 의한 취득 사실을 객관적 자료로 스스로 소명하도록 규정합니다.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이 이의제기 절차보다 쉽게 운용된다면 명의인들이 이의제기 절차를 외면하고 소송만 제기하게 되어 이의제기 절차가 형해화될 우려가 있습니다.
다섯째, 피해자 보호의 실효성 문제입니다. 피해자의 증명 실패를 이유로 명의인의 채무부존재확인 판결이 확정되면, 명의인이 이를 이의제기의 소명자료로 제출하여 피해금 부분에 대한 지급정지까지 해제될 우려가 있고, 이 경우 이후 수사에서 명의인의 책임이 드러나더라도 피해자의 피해 회복은 사실상 불가능해집니다.
Q4. 원고는 전자화폐 거래대금이라는 점을 왜 증명하지 못했나요?
A. 법원은 원고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원고 계좌에 입금된 피해금이 전자화폐 거래대금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 구체적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홈페이지 접속 불가로 인한 검증 불가능 원고는 전자화폐거래소를 폐업하여 홈페이지 접속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원고가 제출한 ‘캡처화면’만으로는 회원가입 사실, 실명 확인 절차 이행 여부, 실제 거래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② 회원 정보의 불완전성 원고가 제출한 회원 상세정보에는 이름과 이메일 주소만 기재되어 있을 뿐, 생년월일·주민등록번호·주소 등 인적사항을 특정할 수 있는 기본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해당 회원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인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③ 전자화폐거래소 운영 사실 자체의 불증명 원고의 법인등기부등본과 사업자등록증에 ‘전자화폐거래소’가 영업 목적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전자화폐거래소 개설 시점, 폐업 경위, 관련 법령상 신고·등록 절차 이행 여부, 매출·영업이익 규모, 인적·물적 설비 구비 여부 등에 관한 구체적 주장·증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④ 비정상적 거래 패턴 원고 계좌는 피해금 입금 전까지 주로 1,000만 원 미만의 소액 거래가 드물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피해금 입금이 시작된 2024년 8월 20일경 이후부터 갑자기 한 번에 수천만 원씩 계속 입금되고 30분 이내에 대부분 출금되는 패턴이 반복되었습니다. 법원은 정상적인 전자화폐거래소 운영자라면 이러한 비정상적 자금 유입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⑤ 전자금융거래제한 조치의 의미 원고는 전자금융거래제한 조치까지 받았는데, 이 조치는 전기통신금융사기와 관련한 형사처벌 전력이 있는 경우에만 이루어집니다. 원고가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은 것도 원고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사정으로 작용하였습니다.
Q5. 이 소송에서 전략적으로 잘한 점과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요?
A. 이 소송의 전략적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잘한 점 ✅
① 채무부존재확인 소송 제기를 통한 지급정지 해제 시도 원고는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이 정한 채무부존재확인 소송 제도를 활용하여 채권소멸절차 진행을 일시적으로 차단하고 지급정지 해제를 시도하였습니다. 이 제도를 활용한 것 자체는 법률이 명의인에게 부여한 정당한 수단을 사용한 것입니다.
② 피고 I에 대한 자백간주 판결 획득 피고 I은 소송에 응하지 않아 자백간주에 의한 판결이 선고되었고, 원고는 피고 I에 대한 청구에서 승소하였습니다. 다수의 피고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응소하지 않는 피고에 대해서는 자백간주 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한 결과입니다.
아쉬운 점 ❌
① 전자화폐거래소 운영 사실에 대한 사전 증거 준비 부재 이 소송의 가장 큰 패인은 전자화폐거래소를 실제로 운영하였다는 사실 자체를 입증하지 못한 것입니다. 법인등기부등본과 사업자등록증에 관련 영업 목적이 기재되어 있지 않았고, 거래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홈페이지도 폐업으로 접근 불가능하였습니다. 정상적인 사업자라면 사업 운영의 흔적이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② 회원 정보 및 거래 내역의 신뢰성 확보 실패 원고가 제출한 캡처화면은 회원의 실명 확인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는 불완전한 자료였습니다. 정상적인 전자화폐거래소라면 특정금융정보법에 따른 실명 확인 의무를 이행하고 그 기록을 보관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공식 기록을 제출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였습니다.
③ 전자금융거래제한 조치에 대한 설명 부재 전자금융거래제한 조치는 형사처벌 전력이 있는 경우에만 이루어지는 것인데, 원고는 자신이 왜 이 조치를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 침묵은 법원의 판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치며
“그렇다면 전자화폐 거래소를 운영하다가 보이스피싱 피해금이 유입되면 무조건 책임을 져야 하나요?” 이 판결의 답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입니다. 법원은 명의인이 정당한 권원에 의한 취득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면 채무부존재확인 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었습니다. 다만 이 사건의 원고는 그 증명에 실패하였을 뿐입니다.
이 판결은 전자화폐 거래소나 P2P 플랫폼을 운영하는 사업자들에게 중요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사업 운영의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기록하고, 실명 확인 등 법령상 의무를 철저히 이행하며, 비정상적인 자금 유입에 대한 모니터링 체계를 갖추는 것이 단순한 컴플라이언스 문제가 아니라 분쟁 발생 시 자신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된다는 것을 이 사건은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