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냥 거래처에 금형도면을 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거래처가 알아서 경쟁사 도면을 보내준 건데, 그게 왜 제 잘못인가요?”
거래처 도면 요청 분쟁
경쟁사의 영업비밀을 직접 빼내지 않고, 공통 거래처를 통해 간접적으로 취득하는 방식은 얼핏 보면 법적으로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판결은 그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거래처에 요구하여 경쟁사의 영업도면을 취득한 행위는 부정한 목적에 의한 영업비밀 취득에 해당합니다. 나아가 거래처에 공개된 도면이라도 이메일 하단의 보안 문구 하나로 비공지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점도 이 판결의 핵심입니다. 지금부터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사실관계 요약
피고인 A는 피해회사와 동종업계에서 경쟁하는 회사에 재직하거나 관련 사업을 영위하는 사람입니다. 피해회사는 Z 시스템의 제조·판매업을 영위하면서 고객사의 요구를 반영하여 작성한 영업도면을 거래처에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피해회사는 영업도면을 거래처에 이메일로 송부할 때 이메일 하단에 보안 문구를 명시하여 제3자에게 누설하지 않을 의무를 거래처에도 부과하고 있었습니다.
피고인 A는 피해회사의 거래처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여 발주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도면 제작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여 경쟁상 이익을 얻으려는 동기에서 거래처에 요구하여 피해회사의 영업도면을 취득하였습니다. 특히 피고인 A는 피고인 회사의 공식 이메일이 아닌 개인 이메일을 사용하여 거래처로부터 영업도면을 받았습니다.
피고인 A는 원심에서 징역 1년 6월(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명령 160시간, 몰수)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서도 원심과 동일한 형이 유지되었습니다. 피고인 B, C, D 주식회사의 항소는 기각되었습니다.
2. 쟁점 정리
가. 이 사건 영업도면이 영업비밀의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하는지 여부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상 영업비밀이 되기 위해서는 ① 비공지성, ② 경제적 유용성, ③ 비밀관리성의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합니다. 피고인 A는 영업도면이 카탈로그나 피해회사의 홈페이지에 공개된 내용과 유사하여 비공지성을 충족하지 못하고, 나머지 요건도 갖추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거래처에 공개된 도면이 영업비밀의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지가 첫 번째 쟁점입니다.
나. 피고인 A에게 영업비밀 취득에 관한 ‘부정한 목적’이 있었는지 여부
피고인 A는 거래처에 ‘금형도면’을 요구하였는데 거래처가 피해회사의 영업도면을 보낸 것이므로, 자신에게 부정한 목적이 없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거래처를 통한 간접적인 영업도면 취득 행위에 부정한 목적이 인정될 수 있는지가 두 번째 쟁점입니다.
다. 비공지성 — 거래처에 공개된 정보도 비공지성이 유지되는지 여부
피고인 A는 영업도면이 거래처에 이미 공개되어 있으므로 비공지성을 결여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거래처에 이메일로 송부된 도면이 비공지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특히 이메일 하단의 보안 문구가 비공지성 유지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세 번째 쟁점입니다.

3. 판시 내용
가. 비공지성 — 인정
법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이 사건 영업도면의 비공지성을 인정하였습니다.
첫째, 피고인 스스로도 영업도면은 고객의 요구를 반영하여 작성되는 것이므로 카탈로그나 홈페이지에 공개된 내용과 동일할 수 없고, 피해회사가 다른 업체에 공개하지 않는 자료임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피해회사의 거래처 관계자들 모두 피해회사의 영업도면을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업체에 유출하는 것이 상도의에 어긋나는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진술하고 있어, 공개하지 않는 관행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볼 여지가 있었습니다.
셋째, 피해회사는 거래처에 이메일로 영업도면을 보내면서 그 하단에 보안 문구를 명시함으로써 영업도면을 제3자에게 누설하지 아니할 의무를 거래처에도 부과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영업도면이 거래처에 공개되어 있다고 하여 비공지성을 결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나. 경제적 유용성 — 인정
법원은 다음과 같은 진술들을 종합하여 경제적 유용성을 인정하였습니다.
피해회사 상무는 수사기관에서 “영업도면은 피해회사와 고객이 최종적으로 협의한 사항을 반영하고 고객으로부터 최초 접수된 표시만 있는 도면에 성형해석, 구조해석 등을 더하여 작성된 도면으로서 역설계의 기초가 되며 금형의 실측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고 Z 시스템 제작까지 가능하다”고 진술하였습니다.
피해회사 거래처 직원도 수사기관에서 “피해회사의 영업도면을 참고하여 단시간 내에 피해회사의 Z 시스템의 단점을 보완하여 향상된 제품을 만들 수 있으므로 경쟁업체에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자료이다”라고 진술하였습니다.
다. 비밀관리성 — 인정
법원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정을 종합하여 비밀관리성을 인정하였습니다.
첫째, 피해회사는 Z 시스템과 관련된 사항 일체를 영업비밀로 지정하고 직원들에게 이를 누설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교부받았습니다.
둘째, 피해회사에서 생성한 문서의 하단에는 보안 문구가 기재되어 있고, 영업도면을 거래처에 송부할 때도 이러한 보안 문구를 첨부하였습니다.
셋째, 피해회사에서 출력된 모든 문서는 출력일시, 출력한 사원의 소속과 성명을 확인할 수 있도록 출력물 이력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넷째, 피해회사의 사무실·연구실·실험실은 허가된 인원에 한해 출입이 허용되고, 사무실 컴퓨터 접속에 필요한 로그인 비밀번호가 이중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외부저장매체는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라. 부정한 목적 — 인정
법원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피고인 A의 부정한 목적을 인정하였습니다.
첫째, 거래처들은 피해회사와 피고인 회사 중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당사자를 거래 상대방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래처들이 피고인 A로부터 요구받지도 않은 자료를 제공해가면서까지 피고인 회사와 거래할 이유는 없는 것으로 보여, 거래처 직원들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둘째, 피고인이 피고인 회사의 공식 이메일이 아닌 개인 이메일을 사용하여 거래처로부터 영업도면을 받은 점은 부정한 목적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이러한 사정들을 종합하여 법원은 피고인이 도면 제작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여 경쟁상 이익을 얻으려는 동기에서 거래처에 요구하여 피해회사의 영업도면을 취득하였다고 판단하였습니다.

4. 핵심 포인트
가. 이메일 하단 보안 문구 하나가 비공지성을 지킨다
이 판결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거래처에 이메일로 공개된 도면이라도 이메일 하단의 보안 문구를 통해 제3자 누설 금지 의무를 부과하면 비공지성이 유지된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입니다. 많은 기업들이 거래처에 자료를 제공하면서 비공지성이 상실될까 우려하는데, 이 판결은 보안 문구를 통한 비밀유지 의무 부과가 비공지성 유지의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 개인 이메일 사용이 부정한 목적의 결정적 증거가 된다
이 판결은 회사 공식 이메일이 아닌 개인 이메일을 사용하여 경쟁사의 도면을 수신한 행위가 부정한 목적을 인정하는 결정적 근거가 된다는 점도 보여줍니다. 공식 채널을 우회하여 개인 이메일로 자료를 수수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비밀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다. 거래처를 통한 간접 취득도 영업비밀 침해다
이 판결은 경쟁사의 영업비밀을 직접 빼내지 않고 공통 거래처를 통해 간접적으로 취득하더라도 부정한 목적에 의한 영업비밀 취득에 해당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거래처가 알아서 보내준 것”이라는 주장은 통하지 않습니다. 거래처에 요구하여 경쟁사의 자료를 취득하는 행위 자체가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을 구성합니다.
라. 영업비밀 보호를 위한 기업의 실무적 체크리스트
| 관리 항목 | 이 사건에서의 조치 | 추가 권장 조치 |
|---|---|---|
| 이메일 보안 문구 | 이메일 하단 보안 문구 명시 | 수신자별 비밀유지 확인서 징구 |
| 직원 서약서 | 영업비밀 비누설 서약서 징구 | 퇴사 시 재확인 서약서 징구 |
| 출력물 이력관리 | 출력일시·사원 정보 기록 | 정기적 이력 점검 및 감사 |
| 접근권한 관리 | 이중 로그인 비밀번호 설정 | 직급별 차등 접근권한 설정 |
| 외부저장매체 | 사용 차단 | 이메일 외부 발송 모니터링 추가 |
| 거래처 관리 | 보안 문구를 통한 의무 부과 | 거래처와 비밀유지계약(NDA) 체결 |
마치며 — 거래처를 통한 우회 취득도, 이메일 한 줄의 보안 문구도 법정에서 결정적 증거가 됩니다
이 판결은 기업과 개인 모두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경쟁사의 영업비밀을 직접 빼내지 않고 공통 거래처를 통해 간접적으로 취득하더라도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개인 이메일을 사용하여 자료를 수수하는 행위는 부정한 목적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반대로 기업 입장에서는, 거래처에 자료를 제공할 때 이메일 하단에 보안 문구를 명시하고, 직원들에게 비누설 서약서를 징구하며, 출력물 이력관리를 철저히 하는 등 체계적인 비밀관리 체계를 갖추면 영업비밀의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됩니다. 영업비밀 보호는 거래처와의 관계에서도 끝나지 않습니다. 거래처와의 비밀유지계약(NDA) 체결을 통해 법적 보호망을 더욱 촘촘히 구축하는 것이 분쟁을 예방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